올해 파이낸셜타임스(FT)가 ‘유럽의 병자 2.0′이라는 용어로 독일을 표현했다. 에너지 대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첨단산업 경쟁력이 갈수록 밀리는 독일이 통일에 에너지를 쏟아부은 여파로 기진맥진하던 199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병자’로 불리고 있다는 얘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독일이 -0.5%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G7 가운데 유일하게 역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유럽에서는 최대 국가 독일만 비틀거리는 게 아니다. 대륙 전체가 긴 쇠락의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1992년만 하더라도 세계 GDP에서 유럽연합(EU) 27회원국의 비율이 28.8%였다. 하지만 점점 축소돼 2012년 20% 선이 무너졌고, 2022년에는 16.7%까지 낮아졌다. 30년 사이 유럽의 비율이 12.1%포인트나 낮아진 것이다. 지난해 세계 GDP의 12.1%는 1경5800조원에 해당한다. 30년간 유럽의 위상이 제자리만 지켰더라도 지난해 EU GDP가 1경5800조원이나 더 많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픽=김의균
물론 에너지 대란과 중국의 경기 침체가 유럽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단기 요인들이다. 그보다는 제조업 중심 경제에서 IT 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에 실패한 후과(後果)가 치명적이라는 게 유럽이 뒤로 처지는 근본적인 이유로 꼽힌다. 이제는 혁신과 변화에 뒤진 낡고 침체된 대륙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유럽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의 싱크탱크인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를 이끄는 프레데릭 에릭손 소장은 유럽이 쇠락해가는 이유에 대해 뼈아프고 냉철한 ‘자아 비판’을 내놓는 학자다. 에릭손 소장은 최근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유럽을 지배하는 고루한 ‘제조업 우선주의’가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며 “특히 노동조합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세력이 제조업 같은 기존 산업에 대한 집착을 키웠고, 혁신 기술을 향한 산업 구조 전환을 저해해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대기업들이 업종 전문화를 이뤄내지 못했고, 유럽 전체에 단일 서비스 시장을 구축하지 못한 영향도 적지 않다”고 했다.
에릭손 소장은 스웨덴 출신으로 웁살라대를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JP모건에서 거시경제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세계은행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스웨덴·영국 정부에서도 경제 정책 자문 역할을 맡은 바 있다. FT가 선정하는 ‘브뤼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30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유럽은 미국의 IT 식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조사업체 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유럽의 검색 시장은 91.5%를 차지하는 구글이 독식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시장도 페이스북(63.6%), 인스타그램(11.5%), 핀터레스트(10%) 등 미국 업체에 잠식당했다.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 시장은 애플(29.1%), 삼성전자(24.6%), 샤오미(11.5%)가 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IT산업은 해외 업체에 완전히 점령당했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에릭손 소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부터 미국과의 IT산업 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금융 위기 1년 전인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할 무렵부터 모바일 세상에서 유럽이 뒤처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유럽에서는 테크 기업을 키워내는 힘도 미약하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의 세계 100대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명단에 독일 기업만 3곳 이름을 올려놓고 있을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기업은 하나도 없다.
-유럽이 IT 전환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에는 제조업 일자리에 대한 ‘페티시(집착)’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서비스 중심 경제로의 전환에 방해가 되는데, 특히 정부와 노조의 연결 고리가 강할수록 더 심해집니다. 독일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이 대표적이죠. 제조업을 우선시하고, 서비스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조는 전통 산업의 일자리를 유지하기 원하고 정치 세력이 여기에 동조하는 식이죠. 이렇게 되면 디지털화를 위한 충분한 투자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독일만 그런 게 아니라 노조와 결속이 강한 정당이 있는 다른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죠. 정치 세력이 변화에 저항하는 노조의 입김에 휘둘릴 때 기술 진보에 따른 사회 경제적 구조 개혁이 지연됩니다.”
그래픽=김하경
-스페인을 비롯한 남유럽은 여전히 관광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사회당과 연정을 구성하던 극좌 정당인 포데모스와 좌파 단체들이 기술 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중시하는 이들은 고용 유연성보다는 일자리 보호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과도한 규제와 세금 역시 스페인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해외 기업이나 투자를 유치하는 것에도 소극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첨단 기술을 수용하는 것도 더뎌졌습니다.”
-유럽 기업들의 성장 전략은 어떤가요.
“기업이 전문성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 문제죠. 유럽의 대표적인 대기업인 독일 지멘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에너지부터 교통, 인프라, 의료기술을 포함해 사업 분야가 매우 다양하죠. 한 분야에서 특출 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반면 미국의 빅테크나 바이오 대기업들은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 특화돼 있어 핵심 분야가 분명하죠.”
그래픽=김하경
유럽에서는 장래가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미국 빅테크에 인수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는 원래 영국 기업이었지만 2014년 구글에 인수됐다. 인터넷 전화 업체였던 스카이프도 에스토니아에서 탄생했지만, 미국 이베이에 인수됐다가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품에 안겼다.
-유럽 스타트업들은 왜 미국 기업에 인수되고 있을까요.
“디지털 기업은 커다란 단일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게 유리합니다. 유럽에서는 언어가 서로 다르고 국가별 정책이 달라 단일 서비스 시장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기업에 인수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기업들이 나오는 겁니다. 영업의 거점을 미국으로 옮겨버리는 유럽의 IT 기업들도 있죠. 유럽의 정책이 첨단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생산성을 높이기보다는 기술 변화로부터 기존 산업을 지키기 위한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최근 유럽 기업들은 AI(인공지능)에 대한 EU 차원의 강도 높은 규제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에릭손 소장은 유럽에서 빅테크가 등장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로 자본 조달 환경 차이를 들었다. 그는 “유럽에서는 개인들이 직접 주식 투자를 하는 경우가 적고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본시장의 자금이 성장 단계에 있는 기업으로 흘러가기 쉽지 않다”고 했다. 미국처럼 자본시장을 활용한 통 큰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은행 대출 같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해 기업들이 자금을 마련하고 있어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증시분석업체 컴퍼니스마켓캡에 따르면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46조9310억달러로 유럽 3대국인 영국(3조940억달러), 프랑스(2조7630억달러), 독일(2조1800억달러)의 증시 시총을 합친 액수의 6배 수준에 달한다.
에릭손 소장은 “유럽에서 좀비 기업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유동성 지원에 의지해 연명하는 회사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좀비 기업이 많을수록 새로운 분야의 신생 기업 성장에 방해가 된다. 망해야 할 기업이 버티면서 정부 지원이나 금융사 대출을 불필요하게 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래픽=김하경
북유럽 국가들은 복지 국가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웨덴 출신인 에릭손 소장은 “북유럽 국가의 복지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00년만 해도 GDP 대비 복지 지출이 스웨덴은 26.4%였다. 당시 미국(14.1%)보다 12.3%포인트 높았다. 그러나 점점 차이가 좁혀져 스웨덴과 미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 비율 격차는 2020년 1.9%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복지에 쓰는 재정 지출상 미국과 스웨덴 사이의 차이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북유럽 복지모델을 이상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북유럽 국가의 복지 모델은 장기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이 덕분에 조기 은퇴도 가능했죠. 이 모델은 강한 노조의 힘과 국민들의 동질감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와 비교적 순탄한 경제 성장의 시대가 1970년대에 막을 내리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노조 조직률이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민자가 많아진 영향으로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예전과 같은 수준의 유대감 강한 사회적 연대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산층은 자신이 낸 세금이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안전망에 쓰이기를 원하지 않게 됐습니다. 게다가 북유럽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높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복지 지출의 비중이 서서히 줄어든 이유가 됐습니다.”
-그래도 북유럽 국가가 근로시간이나 의료체계 같은 피부에 와닿는 사회 시스템에서 앞서 가는 게 아닌가요.
“근로시간처럼 삶의 질에 중요한 요소를 두고서도 북유럽과 미국이 조금씩 서로 닮아가고 있어요. 북유럽에서도 실질적인 근로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는 근로시간이 짧은 편입니다. 서로 간의 차이가 줄어든다는 얘기죠. 의료 서비스 영역에 있어서도 북유럽이 이제는 미국보다 반드시 앞서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더 다양한 약품을 이용할 수 있고, 최신 치료법을 적용받기도 쉽습니다. 돈을 더 들여서라도 더 나은 치료를 받고 싶은 사람에게 유럽이 미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미국보다 안전하다는 장점은 있지 않나요.
“이것도 계속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스웨덴의 남성 살인율(인구 10만명당 살인 피해자 수)은 2012년 1명에서 2020년 1.9명까지 늘었습니다. 총기 사고의 영향입니다. 이민자가 많아지는 가운데 사회적 융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이죠. 스웨덴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도 (안전하고 복지 수준이 높다는) 원래의 북유럽 국가 이미지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지난해 총기사고로 62명이 죽었는데, 이는 2021년(45명)보다 38% 증가한 수치다.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역량이 부족해 총기를 이용한 살인의 80% 정도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래픽=김하경
-유럽 국가들이 다시 성장 동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통적인 유럽의 중심 국가들보다 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에서 경제 구조 개선이 오히려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들 나라에는 자유 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지금의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나타나는 높은 세율이나 과도한 규제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죠. 에스토니아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투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세제 혜택을 주고 있죠. 이처럼 유럽 주요국에서도 세제 개혁이 필요합니다. 신산업의 진입을 막는 정책적 장벽도 없애야 합니다. 대학 교육에 더 투자하고, R&D(연구·개발)에 더 투자하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야 합니다.”
-유럽 경제가 재도약할 기회는 어떤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기술 산업 중에서 유럽 기업들이 선전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핀테크입니다. 미국에 거점을 두고 있지만 아일랜드에서 탄생한 핀테크 회사 스트라이프나 스웨덴의 클라르나가 있습니다. EU는 2010년대 초부터 핀테크 기업의 성장을 돕는 정책들을 내놨습니다. 친환경 기술이나 화학·소재 분야에서도 유럽 기업들은 경쟁력이 있습니다. 정책이 유연하게 바뀐다면 유럽 기업들도 첨단 기술 분야에서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AI와 같은 기술에 적절한 규제가 필요는 합니다. 다만 (혁신의 에너지를 꺾지 않는 선에서) 규제 수위를 적절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EU나 유럽 각국 정부 차원에서 필요합니다.”
유럽에서는 최대 국가 독일만 비틀거리는 게 아니다. 대륙 전체가 긴 쇠락의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1992년만 하더라도 세계 GDP에서 유럽연합(EU) 27회원국의 비율이 28.8%였다. 하지만 점점 축소돼 2012년 20% 선이 무너졌고, 2022년에는 16.7%까지 낮아졌다. 30년 사이 유럽의 비율이 12.1%포인트나 낮아진 것이다. 지난해 세계 GDP의 12.1%는 1경5800조원에 해당한다. 30년간 유럽의 위상이 제자리만 지켰더라도 지난해 EU GDP가 1경5800조원이나 더 많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물론 에너지 대란과 중국의 경기 침체가 유럽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단기 요인들이다. 그보다는 제조업 중심 경제에서 IT 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에 실패한 후과(後果)가 치명적이라는 게 유럽이 뒤로 처지는 근본적인 이유로 꼽힌다. 이제는 혁신과 변화에 뒤진 낡고 침체된 대륙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유럽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의 싱크탱크인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를 이끄는 프레데릭 에릭손 소장은 유럽이 쇠락해가는 이유에 대해 뼈아프고 냉철한 ‘자아 비판’을 내놓는 학자다. 에릭손 소장은 최근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유럽을 지배하는 고루한 ‘제조업 우선주의’가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며 “특히 노동조합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세력이 제조업 같은 기존 산업에 대한 집착을 키웠고, 혁신 기술을 향한 산업 구조 전환을 저해해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대기업들이 업종 전문화를 이뤄내지 못했고, 유럽 전체에 단일 서비스 시장을 구축하지 못한 영향도 적지 않다”고 했다.
에릭손 소장은 스웨덴 출신으로 웁살라대를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JP모건에서 거시경제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세계은행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스웨덴·영국 정부에서도 경제 정책 자문 역할을 맡은 바 있다. FT가 선정하는 ‘브뤼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30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노조에 끌려다니는 정치세력이 혁신 막는다”
유럽은 미국의 IT 식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조사업체 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유럽의 검색 시장은 91.5%를 차지하는 구글이 독식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시장도 페이스북(63.6%), 인스타그램(11.5%), 핀터레스트(10%) 등 미국 업체에 잠식당했다.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 시장은 애플(29.1%), 삼성전자(24.6%), 샤오미(11.5%)가 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IT산업은 해외 업체에 완전히 점령당했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에릭손 소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부터 미국과의 IT산업 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금융 위기 1년 전인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할 무렵부터 모바일 세상에서 유럽이 뒤처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유럽에서는 테크 기업을 키워내는 힘도 미약하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의 세계 100대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명단에 독일 기업만 3곳 이름을 올려놓고 있을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기업은 하나도 없다.
-유럽이 IT 전환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에는 제조업 일자리에 대한 ‘페티시(집착)’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서비스 중심 경제로의 전환에 방해가 되는데, 특히 정부와 노조의 연결 고리가 강할수록 더 심해집니다. 독일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이 대표적이죠. 제조업을 우선시하고, 서비스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조는 전통 산업의 일자리를 유지하기 원하고 정치 세력이 여기에 동조하는 식이죠. 이렇게 되면 디지털화를 위한 충분한 투자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독일만 그런 게 아니라 노조와 결속이 강한 정당이 있는 다른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죠. 정치 세력이 변화에 저항하는 노조의 입김에 휘둘릴 때 기술 진보에 따른 사회 경제적 구조 개혁이 지연됩니다.”
-스페인을 비롯한 남유럽은 여전히 관광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사회당과 연정을 구성하던 극좌 정당인 포데모스와 좌파 단체들이 기술 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중시하는 이들은 고용 유연성보다는 일자리 보호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과도한 규제와 세금 역시 스페인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해외 기업이나 투자를 유치하는 것에도 소극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첨단 기술을 수용하는 것도 더뎌졌습니다.”
-유럽 기업들의 성장 전략은 어떤가요.
“기업이 전문성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 문제죠. 유럽의 대표적인 대기업인 독일 지멘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에너지부터 교통, 인프라, 의료기술을 포함해 사업 분야가 매우 다양하죠. 한 분야에서 특출 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반면 미국의 빅테크나 바이오 대기업들은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 특화돼 있어 핵심 분야가 분명하죠.”
“좀비 기업이 발목 잡는다”
유럽에서는 장래가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미국 빅테크에 인수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는 원래 영국 기업이었지만 2014년 구글에 인수됐다. 인터넷 전화 업체였던 스카이프도 에스토니아에서 탄생했지만, 미국 이베이에 인수됐다가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품에 안겼다.
-유럽 스타트업들은 왜 미국 기업에 인수되고 있을까요.
“디지털 기업은 커다란 단일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게 유리합니다. 유럽에서는 언어가 서로 다르고 국가별 정책이 달라 단일 서비스 시장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기업에 인수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기업들이 나오는 겁니다. 영업의 거점을 미국으로 옮겨버리는 유럽의 IT 기업들도 있죠. 유럽의 정책이 첨단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생산성을 높이기보다는 기술 변화로부터 기존 산업을 지키기 위한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최근 유럽 기업들은 AI(인공지능)에 대한 EU 차원의 강도 높은 규제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에릭손 소장은 유럽에서 빅테크가 등장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로 자본 조달 환경 차이를 들었다. 그는 “유럽에서는 개인들이 직접 주식 투자를 하는 경우가 적고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본시장의 자금이 성장 단계에 있는 기업으로 흘러가기 쉽지 않다”고 했다. 미국처럼 자본시장을 활용한 통 큰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은행 대출 같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해 기업들이 자금을 마련하고 있어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증시분석업체 컴퍼니스마켓캡에 따르면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46조9310억달러로 유럽 3대국인 영국(3조940억달러), 프랑스(2조7630억달러), 독일(2조1800억달러)의 증시 시총을 합친 액수의 6배 수준에 달한다.
에릭손 소장은 “유럽에서 좀비 기업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유동성 지원에 의지해 연명하는 회사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좀비 기업이 많을수록 새로운 분야의 신생 기업 성장에 방해가 된다. 망해야 할 기업이 버티면서 정부 지원이나 금융사 대출을 불필요하게 끌어가기 때문이다.
“북유럽은 이제 ‘복지 천국’ 아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복지 국가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웨덴 출신인 에릭손 소장은 “북유럽 국가의 복지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00년만 해도 GDP 대비 복지 지출이 스웨덴은 26.4%였다. 당시 미국(14.1%)보다 12.3%포인트 높았다. 그러나 점점 차이가 좁혀져 스웨덴과 미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 비율 격차는 2020년 1.9%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복지에 쓰는 재정 지출상 미국과 스웨덴 사이의 차이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북유럽 복지모델을 이상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북유럽 국가의 복지 모델은 장기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이 덕분에 조기 은퇴도 가능했죠. 이 모델은 강한 노조의 힘과 국민들의 동질감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와 비교적 순탄한 경제 성장의 시대가 1970년대에 막을 내리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노조 조직률이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민자가 많아진 영향으로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예전과 같은 수준의 유대감 강한 사회적 연대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산층은 자신이 낸 세금이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안전망에 쓰이기를 원하지 않게 됐습니다. 게다가 북유럽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높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복지 지출의 비중이 서서히 줄어든 이유가 됐습니다.”
-그래도 북유럽 국가가 근로시간이나 의료체계 같은 피부에 와닿는 사회 시스템에서 앞서 가는 게 아닌가요.
“근로시간처럼 삶의 질에 중요한 요소를 두고서도 북유럽과 미국이 조금씩 서로 닮아가고 있어요. 북유럽에서도 실질적인 근로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는 근로시간이 짧은 편입니다. 서로 간의 차이가 줄어든다는 얘기죠. 의료 서비스 영역에 있어서도 북유럽이 이제는 미국보다 반드시 앞서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더 다양한 약품을 이용할 수 있고, 최신 치료법을 적용받기도 쉽습니다. 돈을 더 들여서라도 더 나은 치료를 받고 싶은 사람에게 유럽이 미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미국보다 안전하다는 장점은 있지 않나요.
“이것도 계속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스웨덴의 남성 살인율(인구 10만명당 살인 피해자 수)은 2012년 1명에서 2020년 1.9명까지 늘었습니다. 총기 사고의 영향입니다. 이민자가 많아지는 가운데 사회적 융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이죠. 스웨덴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도 (안전하고 복지 수준이 높다는) 원래의 북유럽 국가 이미지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지난해 총기사고로 62명이 죽었는데, 이는 2021년(45명)보다 38% 증가한 수치다.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역량이 부족해 총기를 이용한 살인의 80% 정도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옛 공산권이 오히려 더 혁신적”
-유럽 국가들이 다시 성장 동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통적인 유럽의 중심 국가들보다 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에서 경제 구조 개선이 오히려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들 나라에는 자유 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지금의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나타나는 높은 세율이나 과도한 규제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죠. 에스토니아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투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세제 혜택을 주고 있죠. 이처럼 유럽 주요국에서도 세제 개혁이 필요합니다. 신산업의 진입을 막는 정책적 장벽도 없애야 합니다. 대학 교육에 더 투자하고, R&D(연구·개발)에 더 투자하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야 합니다.”
-유럽 경제가 재도약할 기회는 어떤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기술 산업 중에서 유럽 기업들이 선전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핀테크입니다. 미국에 거점을 두고 있지만 아일랜드에서 탄생한 핀테크 회사 스트라이프나 스웨덴의 클라르나가 있습니다. EU는 2010년대 초부터 핀테크 기업의 성장을 돕는 정책들을 내놨습니다. 친환경 기술이나 화학·소재 분야에서도 유럽 기업들은 경쟁력이 있습니다. 정책이 유연하게 바뀐다면 유럽 기업들도 첨단 기술 분야에서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AI와 같은 기술에 적절한 규제가 필요는 합니다. 다만 (혁신의 에너지를 꺾지 않는 선에서) 규제 수위를 적절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EU나 유럽 각국 정부 차원에서 필요합니다.”
홍준기 기자 everywher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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